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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WORLD ISSUE REVIEW

미얀마 군부 쿠데타와 아웅산 수치

by Herrenn 2021.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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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엔 미얀마 총선이 있었습니다. 

2015년 총선을 통해 아웅 산 수치가 이끄는 NLD(민족민주동맹)가 정권을 차지하며 군부독재를 끝낸 후 맞이한 두 번째 총선이었죠.

 

2020년 총선에서도 NLD는 전체 의석수의 83%를 차지하며 문민정부 2기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군부에선 800만명 이상이 유권자명부에 부정하게 등록되었다며 불복을 선언, 지난 2월 1일 1년간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며 쿠데타를 일으켰고 현재 국가고문인 아웅 산 수치는 또다시 가택연금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우리에게도 낯설지만은 않은 미얀마 군부 쿠데타 사태와 미얀마 민주주의 운동의 아이콘인 아웅 산 수치에 지난 발자취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는 포스팅을 준비했습니다. 

 

Ⅰ독립영웅의 딸 민주주의의 영웅이 되다

*배경

미얀마는 1885년에 영국 식민지로 편입되어 1947년 독립하기까지 60여년을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으며 식량과 자원을 수탈당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배 전략인 Devide and Rule 에 따라 소수민족이 다수민족인 버마를 지배하는 형태로 식민지를 다스렸고 이에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힘을 모으는것이 어려웠죠.

하지만 2가지 사건을 통해 미얀마의 독립운동은 급류를 타게 됩니다.

첫 번째는 아웅 산 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등장

두 번째는 일본의 대두 였죠.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식민지배를 받고있던 많은 아시아 국가에 영감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당해보니 더한놈들 이었다는 것도 금방 깨달았긴 하지만,,)

아웅 산도 그렇게 영감을 받은 인물 중 한명으로 미얀마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영국에서 체포령이 내리자 일본으로 망명, 그 후 중국에서 독립군을 키워 일본군과 함께 최대도시인 양곤을 탈환하며 독립에 성공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버마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워 일본이 더욱 가혹한 식민지배를 시행하자 일본에 대한 저항운동도 지도하게 되죠.

결국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패배 후 다시 영국령이 된 미얀마,, 아웅 산은 1947년 1월  영국으로 건너가 당시 총리였던 애틀리를 만나 미얀마 독립의 첫 걸음이라 불리는 애틀리-아웅 산 협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협약의 내용은 1년 내 버마를 독립시킨다는 내용이었고 그 조건으로 소수민족의 의견을 존중할 것을 요청하죠.
(미얀마엔 수 많은 소수민족이 있습니다. 몇 년전 학살의 고통을 당한 로힝야족도 그 중 하나죠)

 

소수민족과 독립 이야기는 끝도 없으니 이쯤에서 각설하고 이렇게 미얀마의 독립을 90퍼센트 이상 만들어낸 아웅 산은 정작 조국이 독립은 보지 못한 채 1947년 7월 영국 식민정부 수장인 우 소(U saw) 에 의해 암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니 이때 아웅 산 수치의 나이는 두 살 이었습니다.

 

*성장

 

아웅 산이 암살된 후 아웅 산 수치는 인도와 영국에서 성장하였으며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치학,철학, 경제학을 공부한 후 뉴욕의 UN본부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1972년엔 영국인 에어리스를 만나 슬하에 두 자년를 두죠.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중 1988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돌아간 미얀마에서 군부독재에 저항하다 죽어가는 학생과 승려(미얀마는 불교국가)들을 본 아웅 산 수치는 본격적으로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후,, 이를 두고볼리 없는 군부정권에 의해 가택연금 되어버리죠.

군부정권의 토대가 된 미얀마 군부가 아웅 산 수치의 아버지인 아웅 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 없으므로 군부정권에서 차마 신변에 다른 위해는 가하지 못했죠. 

 

이후 2010년까지 아웅 산 수치는 나왔다 갇혔다를 반복하는 와중에도 민주화 운동을 이어갑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되죠.

이후 외국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도와주던 영국인 남편이 1999년 전립선 암으로 사망하는 등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도 민주화의 의지를 꺽지 않았던 수치 여사는 2010년 총선과 함께 가택연금에서 풀려나면서 본격적인 정치행보를 보이게 됩니다. 

 

*현재

 

2012년 치뤄진 보궐선거에서 본인도 하원의원과 당선되었을 뿐 만 아니라 수치 여사가 이끄는 NLD가 총 의석수 45석 중 43석을 얻어내는 쾌거를 이루어냈습니다.

이후 2015년 치뤄진 총선에서도 NLD는 압승을 거두며 기나긴 군부정권에 드디어 끝이 도래한듯 했죠.

 

하지만 2017년 7000여명의 로힝야족이 미얀마군에 의해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국가 고문이라는 실질적인 지도자 자리에 있는 아웅 산 수치는 이를 방관 했다는 이유로 국제사회에서 비판을 받으며 지금까지 쌓아온 민주주의의 수호자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됩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아웅 산 수치가 군부를 장악하지 못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분도 없고 이득도 없는 저런 학살을 아웅 산 수치가 군부를 장악하고 있었다면 과연 지시 했을까요?  

아마 2020년 총선마저 승리한 NLD를 군부에서 더이상 용납하지 못한건 정해진 수순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전혀 군부를 장악하지 못했으니까요. 

 

군부정권이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것 그리고 야당이 2번 이상 집권하면 기존 집권세력이 반드시 무언가 일을 꾸민다는것

최근 미얀마 사태에서 기시감이 드는건 왜일까요,,ㅎㅎ

 

어쨋든 2020년 11월 이뤄진 총선에서도 NLD가 압승하자 군부정권에선 유권자 등록 부정의혹을 제시하며 불복 2월1일 쿠데타를 일으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현 정권의 지도부를 연금합니다.

 

*전망

 

쿠데타 이후 국제사회에선 연일 이를 맹비난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에선 바이든 대통령까지 성명을 발표하며 압박하고있죠. 

하지만 미얀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에선 이에대해 별다른 입장표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페이스북등을 차단한 미얀마 군부정권의 방화벽을 중국이 지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미얀마 군부 쿠데타사태는 미중간의 파워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독립이후 여전히 신음하고있는 미얀마의 현 상황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해봤습니다. 

짧게 정리하고 싶었는데 하다보니 양이 상당하네요

고통받고 있는 미얀마 시민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민주주의 국가 시민의 한 사람으로써 미얀마에 하루빨리 민주주의가 도래하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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